the 채움교회 소개 | Sermon & Worship
the 채움교회의 주일예배 말씀을 다시 듣고, 목회 칼럼을 통해 말씀과 예배의 의미를 더 깊이 나누실 수 있길 소망합니다.
✨ 주일 말씀 Play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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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염려와 근심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인생을 “수고와 눈물뿐이요” 라고(시90:10) 말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에게는 없는 한 가지를 더 끌어 안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오는 갈등과 괴리감일 것입니다.
불신자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탓할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혹 미필적 고의로 주일예배를 건너 뛰면 양심이 괴롭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고 야단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찜찜함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범해도 드러나지만 않으면 남들도 내 처지가 되면 그럴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 혹은 어쩔 수 없었다고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넘어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슴이 두근 두근, 얼굴이 붉어지고 신앙인의 양심으로 도저히 이게 아닌데 하는 이런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오는 갈등과 괴리감 때문에 자유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현실과 신앙 사이의 갈등과 괴리감이 ‘어쩔 수’ 없다는 상황 때문인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스파이로 오해 받습니다. 총리대신(요셉)은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가서 식구들을 봉양한 다음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와야 시므온을 풀어 줄 것이라 했습니다. 이 사실에 아버지 야곱은 펄쩍 뛰면서 반대를 합니다. 왜냐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두 아들 중 요셉은 이미 어릴 때 죽었고(?) 이제 베냐민 뿐인데 그 마저 잘못 되면 아내에 대한 미안함, 아비로서의 무능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냐민을 보내주지 않으면 시므온은 감옥에 있어야 하고 계속되는 기근으로 식구들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베냐민을 놓았을 때 시므온도 온 식구도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 신앙과 현실에서 오는 갈등과 괴리감 때문에 힘겨워 하는 것은 내가 포기를 못하고, 내려 놓지 못하는 그 어떤 ‘베냐민’ 때문은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과 타협하면서도 신앙과 현실에서 오는 갈등과 괴리감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아닙니까? 다른 것 다포기해도 그것만은 안된다는 그 베냐민을 놓아야 갈등이 사라지고 괴리감도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베냐민을 놓으십시오.
요즘은 웬만한 스마트 폰에는 길 찾는 네비게이션 기능이 있어서 찾을 곳의 주소만 입력하면 손쉽게 목적지에 갈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조금만 벗어나도 ‘경로 재설정’이라는 음성이 곧 바로 들려옵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잘 하고 있습니까? 혹시 내 삶의 경로는 재설정해야 할 부분은 없습니까? 또한 목적지를 향해 바로 가도록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을 잘 따르고 계십니까? 한 탐험가가 아프리카 정글 한복판을 탐험하고 있습니다. 가이드가 큰 잡초와 무성한 덤불들을 칼로 이리저리 자르며 능숙하게 길을 안내하고 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정글과 무더위에 지친 탐험가가 볼멘소리로 이런 푸념을 늘어 놓습니다. “여기가 어디요? 도대체 어딜 가는지는 알고나 가는거요?” 이에 노련한 가이드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리더니 웃으면서 말합니다. “제가 곧 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탐험가처럼 똑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어디로 데리고 가시려는 겁니까? 이렇게 내 삶의 복잡하고 고통스러운데 도대체 언제 이 형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내 인생에서 환란의 끝이 있기는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그 가이드와 마찬가지로 일일이 우리에게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고 하시면서도 그 ‘그 보여 줄 땅’이 어디인지 알려주시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한 두가지 힌트는 주실지 몰라도 그게 전부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설명하신다고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 힌트보다는 정답을 원합니다.
그 탐험가처럼 우리는 우리 인생의 정글, 삶의 음침한 골짜기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보여주셔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답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분만이 우리 인생의 완전한 네비게이션입니다. 혹 믿음의 달음질을 잘못하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면 그분과 함께 인생 경로를 재설정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새해가 벌써 18일째입니다. 복을 나누는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틀러의 독재에 대항하다가 8년간 감옥에 갇힌 로멜러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많은 울분과 미움, 그리고 복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가 전범으로 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다른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일곱 번이나 같은 꿈을 꾸었다고 말합니다.
꿈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 목사의 뒤쪽에 있는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그 사람을 향해 심판하시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예수를 믿지 않았느냐?”
이에 그 뒷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이 목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많이 듣던 목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그는 그렇게도 자신을 고문하고 괴롭혔던 히틀러였습니다.
목사는 고백합니다.
“아, 나는 저 친구를 독재자라고 대항하며 미워하고 죽일 생각을 하고, 어떻게 복수할까 궁리했지만 그를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구나. 전쟁의 책임은 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있었구나.”
그렇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는 많은 상처와 아픔, 또는 울분과 억울함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 때문입니까? 사람이나 환경 때문입니까? 다 나 때문이 아닐까요? 그 많은 상처와 아픔, 혹은 복수심을 품을수록 우리는 더욱 괴롭게 되고 힘들어질 뿐입니다. 씻어버려야 합니다.
강물을 거슬러 가며 카약(kayak)을 탈 때면 수많은 바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암초들을 치우면서 타지 않습니다. 피해 가며 타야 합니다. 그런데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나 바위와 암초들이 물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의 삶, 우리 신앙생활에도 경제적인 암초, 질병이나 관계의 어려움 등 곳곳에 인생의 바위들이 즐비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기에 충분한 달갑지 않은 요소들입니다.
그때마다 이런 것들과 싸워 이겨낸다는 것은 여간해서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가득 차 넘치면 이런 암초들은 성령님의 능력 안에 잠기게 되고 우리는 믿음의 카약을 끝까지 탈 수 있습니다.
이해와 사랑, 자비와 겸손이라는 인격의 강물이 나를 덮어 그 수위를 높일 때 믿음은 전진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 것은 외부의 높은 산이나 계곡보다는 내 안에 있는 탐욕, 이기심 같은 암초, 억울함이라는 바위, 시기와 열등감이라는 자갈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닐까요?
자동차 엔진에 끼는 찌꺼기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엔진 오일을 알맞게 교체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똬리를 트는 미움, 이기심, 분노, 욕심을 성령님의 은혜로 씻어내며 강건한 한 해, 풍성한 한 해를 일구어 가시기 바랍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가로챈 야곱은 형의 살기 등등 함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주하여 20년의 세월을 보낸 후 금의환향합니다. 그러나 형님의 노여움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에 두려운 야곱은 가축과 종들 먼저 앞세우고 그 뒤를 자식들, 아내들이 따르게 하고 자신은 홀로 남아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
날이 새도록 씨름 하다가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환도뼈)을 칩니다” (창32:25). 허벅지가 탈골 되었으니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관절이 빠지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꺾이지 않던 야곱이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싸움을 멈춥니다. 야곱은 자신과 씨름하는 분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임을 알고 더 이상 대들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 하필 ‘환도 뼈’였을까요? 이 환도 뼈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힘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환도 뼈가 부러졌다는 것은 자아가 꺾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절)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야곱이 허벅지 관절이 상한 상황에서도 물고 늘어져서 끝내 응답 받았다고 오해를 많이 합니다. 아닙니다. 끈기 있게 기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허벅지 관절이 골절 되었는데 어떻게 씨름을 계속 할 수 있습니까? 싸움은 이미 끝났습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싸움이 아니라 매달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한 후에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그전까지 야곱의 삶은 매달림이 아니라 발버둥이었습니다. 발버둥과 매달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발버둥은 뭔가를 믿고 있다는 겁니다. 내 노력, 내 경험, 내 지식, 등 어떤 뒷배가 있으니 발버둥 칩니다. 매달림은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점이 내가 매달리는 그 상대에게 있는 것입니다. 관절이 뒤틀렸는데 어떻게 발버둥을 칩니까? 눈치 9단인 야곱은 씨름을 하면서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싸우는 적에게 축복해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축복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재산이나 권력을 줄 때 축복했습니다. 두 번째는 내 삶을 부탁할 때 축복해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28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잡고 계시던 샅바를 놓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관절이 탈골 되었는데 정말 야곱이 이겼습니까? 이 말씀의 원래 뜻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내 힘으로 발버등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신앙은 더 이상 발버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맡기는 매달림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부끄러움도 아닙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의 그 은혜만을 구하며 매달리는 한 해가 되십시오.
새해 첫 주일입니다. 작년 12월 31일과 올해 1월1일 사이에는 특별한 시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1년을 365일로 하고 366일째는 그 다음 해로 하자는 약속을 했을 뿐입니다. 그 약속이 있기 때문은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반성과 함께 새로운 결심을 하면서 새해를 맞는다는 데서 참 좋은 약속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366일 째가 되고 367일 째가 되어도 내가 달라지거나 내가 변하지 않으면 그 해는 새해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별 생각없이 내 자신의 생각이 새로워 지거나 행동이 새로워진 것은 없으면서 형식적으로 ‘새해 복 받으세요’ 라고 인사하지 않습니까? 옛 가치관, 옛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옛 사람이면서 그냥 산술적으로 해가 바뀌었다고 새해라고 생각하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인사한다면 그 인사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고 촉구합니다. 이 말씀은 “벗어 버리는 일과, 입어야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내가 결단하고 실천해야 하는 일이고 그때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란 아담 안에, 즉 원죄 아래 일생 동안 죄에 매어 종 노릇하던 인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옛 사람을 죽이라” 하지 않고 “벗어 버리라”고 말씀하는 데서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라는 말씀대로, 옛 사람은 벌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함께 장사 지낸바 된 자들(롬6:6)이기 때문입니다. 즉 “본질상 진노의 자녀” (엡2:3)였던 옛 사람은 벌써 오래전에 죽었는데 이제 와서 또 “옛 사람을 죽이라”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죽이라 하지않고 벗어 버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무슨 뜻일까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교복이 있고 군복이 있고 운동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은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 버리라”는 행실(창35:2)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은 이미 죽었고 새 사람이 된 자들인데 아직도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의 습관(행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벗어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신분은 바뀌었는데 행실은 옛 사람의습관이 남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옛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우리교회는 미국, 캐나다,중남미, 유럽, 일본, 호주, 뉴질랜드를 아우르는 해외 한인 장로회 (Korean Presbyterian Church Abroad, KPCA) 와 한국의 예장 통합(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PCK) 교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