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채움교회 소개 | Sermon & Worship
the 채움교회의 주일예배 말씀을 다시 듣고, 목회 칼럼을 통해 말씀과 예배의 의미를 더 깊이 나누실 수 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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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담에 “나의 고뿔(감기)이 남의 중병(난치 혹은 불치병)보다 더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남의 괴로움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나의 괴로움보다는 마음이 쓰이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속담을 오늘날에 적용해 본다면, 자신밖에 모르는 극도의 이기심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을 고발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너무 비약일까요?
굳이 현대인들뿐이겠습니까? 그 옛날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임을 웅변하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 역시 자신을 위한 메시아로서의 환영이지, 예수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만족을 채우고, 자신들의 현안을 해소하기 위해 예수님을 열렬히 맞이한 것에 불과한, ‘자기 감기’에만 관심을 둔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리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목적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 이유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펼쳐 레드카펫(?)의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있는 무리들을 보는 예수님의 심리는 어떠했을까요?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불과 며칠 뒤, 열렬한 환영의 외침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돌변한 장본인들이었으니 예수님의 속내가 어떠했을까요? 차라리 양아들인 브루투스에게 배신당하여 죽어가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친 시저처럼, 무슨 원망이라도 한마디 하셨으면 속이 시원할 텐데 주님은 바보같이 가셨습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의의 겉옷, 자기 만족과 욕심의 레드카펫을 만들어 십자가의 길에 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길을 함께 가겠다고 외치는 무리가 우후죽순, 그 속에 내 자신도 섞여 있음을 어찌 부인하겠습니까? 십자가의 길과 레드카펫이 어디 어울리기나 하겠습니까? 목사가 된 지 30년이 훨씬 지난 올해도 여전히 종려주일을 맞습니다. 목사가 되어가고 있는지, 주님 제가 목사 맞습니까?
남이 모르는 나만의 고통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이 못 느낄 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를 때, 나는 답답하고 혼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예수님도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몰랐고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주아주 오래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그때였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를 환영하며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땅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했던 명마를 타고 위엄 있게 어깨에 힘을 주시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짐을 지고 나르는 나귀, 그것도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임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평화가 무엇인지 보여주시고, 우리가 평화를 위하여 살 수 있도록,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 그래서 나를 바로 구원하기 위해, 자원하여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거웠을까? 사람들은 미련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불과 며칠 후 그 환영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메아리칠 저들이기에 그저 주님의 마음은 검게 타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생각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자기 의, 자기만족, 자기 욕심에 도취되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무리 속에 내 자신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외치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모양은 어쩜입니까? 여전히 주님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나는 누구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아파하고 있습니다. 언제쯤이면, 내년이면 저 무리로부터 헤어나올 수 있을까요?
새색시 치마보다 더 고운 옥색의 하늘, 이에 질세라 푸르름을 한껏 자아내는 바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어느 날 하버(Harbour)를 건너면서 넘실거리는 파도에 춤을 추는 수많은 보트(Boat)들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 보트들을 바라보면서 스치는 몇 가지 생각을 적어봅니다.
먼저, 그 보트들 모두 주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트의 크기나 모양은 약간씩 달라도 주인 없는 보트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70억의 인구가 있고 제각기 다른 언어와 얼굴색, 다른 문화와 다른 곳에서 살아도 그 인생의 주인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그럼에도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사실을 고집하며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 때가 허다합니다.
또 하나, 보트는 주인이 타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인이 와서 보트를 움직이게 해야 비로소 보트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보트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역할은 주인이 나를 다스릴 그때 ‘나’라는 존재 가치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뭔가를 하면서 내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할 때가 많았고 주인이 원하지도, 허락하지도 않은 일도 많이 한다는 깨달음과 나의 주인이 세상에서 나를 사용하실 때 부지런히 주인의 필요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보트를 떠나면 보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주인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루 혹은 일년, 이년을 다시 주인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보트 스스로 바다로 나가려 한다면 갈 수도 없거니와 혹 나간다 할지라도 얼마 못 가서 부서지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스스로 내 인생의 때를 정할 수 없고 주인이 가라고 하면 가야 하고 서라고 하면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동적이고 제한된 인생 같지만 실수나 시행착오가 없는 더 능동적인 인생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보트가 훌륭한 최첨단 장비를 갖추었다 해도 바닷물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듯이 내가 세상적인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해도 성령님의 기름 부르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하버를 지나면서 해 본 생각들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종교 개혁의 정신에 따라 전통이나 의식보다는 말씀에 근거한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을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사순절의 의미가 카톨릭보다 약하다. 그러나 교회는 역사와 현실이라는 상황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전통이나 의식이 형성되어 왔다. 예를 들면,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나 수요예배, 금요 심야 기도회가 한국 교회가 만든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것들이 십계명처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성경의 명령이 아닐뿐더러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 교인들은 새벽기도회나 수요예배 등에 참석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있으며 (근래에 와서 약화되고 있다) 항존 직분자를 택함에 있어서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에서 말하는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겨 볼 만하다.
“우리들이 해마다 지키는 사순절은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하는 계절이다. 교회 전통으로 이 사순절을 그리스도인들의 경건 훈련 기간으로 여겨왔다. 그리스도인들의 경건 훈련이란 기도 생활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 그리고 금욕 생활과 구제 생활을 그 내용으로 한다. 구체적으로, 금식 특히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회를 갖는 일과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흔적을 생각하는 일,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하기에 유익한 절기라 하겠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개신교가 지키는 사순절의 내용과 형식은 가톨릭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개신교에서는 정형화된 틀보다는 개인적 신앙이나 개인적 견해와 판단으로 동참하도록 권유한다면 가톨릭에서는 의무에 가까운 예식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순절 셋째 주일이다. 어떤 분이 “사순절은 네 가지를 순하게 만드는 절기”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사순절의 의미가 퇴색되고, 희석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네 가지는 아니다 할지라도 금식을 포함한 기도 훈련,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훈련, 그리스도인의 소중한 덕목인 절제 훈련, 섬김의 훈련 중 하나라도 실천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올해의 사순절이 되었으면 한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고난은 부활이라는 영광을 향하기 때문이다.
“이 목사님, 김 ** 목사입니다. 이거 연습으로 하는 것입니다. 답 주시면 감사하겠슺니가. 아직 메세지 보내는 것이 서툴러소...” “ 목사님 감사합니다. 평안하세요.” 얼마전 아흔이 넘은 노 목사님이 보내온 메시지에 대한 저의 답신입니다.
초등학생조차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일상화 된 문자 메시지의 편리함과 유익함은 문명의 이기답게 실로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 폐해도 여간 심각하지 않습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는 문자 보내기 삼매경, 심지어 예배 중에도 문자를 주고 받는 것은 이미 예삿일입니다.
노 목사님을 보면서 제가 연습 상대로 택함(?)받았다는 것이 참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고 있는 목사들이 한 두 분이 아닐 텐데 그 순간 그 목사님에게 생각난 사람이 저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제가 그 목사님에게 기억되어 선택 받았다는 사실이 감동으로 다가 왔다는 것이죠. 그게 무슨 대수라고, 별것 아닌데 혼자서 감동한다고요? 그런가요? 어떤 일을 하려 할 때나 촌각을 다투는 일이 부지 중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고 기억 되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는70억의 인구 가운데서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고 계심을 아십니까? 그것도 연습 상대로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긍휼의 대상으로 알고 계신다는 것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아도, 못해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카카오톡 친구 란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번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어른이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자 메시지 보내는 방법을 배우려는 열정이 무척 신선하고 아름답게 다가 왔습니다. 어쩌면 손주들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할아버지의 내리사랑일 수 있겠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르고 함께 호흡하기 위해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공유하려는 노 목사님의 의지는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순간 심령을 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나를 더 많이, 더 깊이 알려는 사모함과 열정이 어느 정도이니?” “ 저...저.... 부끄러워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구름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살포시 수줍은 듯 웃고 있었습니다. 경건과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이 순간에 누가 가장 먼저 기억납니까? 그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보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이 도보로 사막을 횡단하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설상가상 지니고 있던 식량마저 다 떨어졌습니다.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결사적으로 걸었습니다. 마침내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샘터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샘물을 마시는데, 얼마 전에 누군가가 그 주변에 천막을 쳤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혹시 먹다 남은 음식 조각이라도 떨어진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주변을 자세히 살피는데 저만큼 주머니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주워 만지는데 손에 뭔가 단단한 것이 잡혔습니다. 얼른 그 주머니를 풀어 보았습니다. 주머니 속에는 형형색색 아름다운 진주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진주를 한 움큼 손에 들고서 사방으로 내던지며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겨우 진주라는 말인가?” “겨우 진주라는 말인가?” 그리고는 얼마 후 그 사람은 그 사막 한가운데서 굶어 죽어 갔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진주처럼 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내 삶에 진주만 있으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 인생을 화려하게 하고 멋지게 꾸미도록 우리를 돕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작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채워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교만하게 만들고 인간성을 상실하게도 만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번쩍거리는 것에 현혹되어서 눈에 보이는 것들과 사람들의 이목에 편승하여, 정작 우리 삶 속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꼭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잊고 살 때가 허다합니다.
“아이들아, 내 말을 받아들이고, 내 명령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여라.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명철에 네 마음을 두어라. 슬기를 외쳐 부르고,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여라.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화를 찾듯 그것을 찾아라. 그렇게 하면, 너는 주님을 경외하는 길을 깨달을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터득할 것이다” (잠언 2:1-5, 새번역).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귀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오늘도 우리 인생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자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진주보다 더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천로역정이라는 기독교 고전을 학창 시절에 읽어 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함께 성경 다음으로 사랑받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천로역정은 17세기 영국의 복음전도자인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작품으로 영어 제목은 “The Pilgrim’s Progress in the Similitude of a Dream”입니다. 번역하면 “꿈에 비유해서 쓴 순례자의 편력”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말은 한문의 제목을 그대로 옮겨 ‘천로역정’이라 합니다.
‘천로’는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말하며,‘역정’은 거쳐 온 길을 뜻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기독도가 해석자의 집에 도착하여 큰 방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하녀가 들어와서 빗자루를 가지고 막 방을 쓸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납니다. 쓸면 쓸수록 먼지는 계속 일어나는데 하녀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계속 빗질을 합니다. 얼마 후 한 사람이 거기에 물을 끼얹습니다. 그러니까 먼지가 다 잦고 깨끗이 쓸렸습니다.
여기서 큰 방은 ‘인간의 마음’이고 먼지는 ‘죄’, 빗자루는 ‘율법’(도덕)입니다. 빗자루로 쓸수록 먼지는 계속 나옵니다.
“착하게 살아라”, “올바른 사람이 되어라”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해서 갈등만 생깁니다. 그러나 물은 복음입니다. 복음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죄 사함을 받았을 때 우리의 마음은 회복됩니다. 도덕이 실패한 곳에서 복음이 시작됩니다. 인간의 윤리가 실패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윤리가 필요 없고 도덕적인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즉 빗자루로는 우리 마음의 방에 있는 먼지인 궁극적인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불신자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복음과 도덕의 차이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단순히 도덕이나 율법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는 복음이 아닙니다. 도덕도 복음이 아닌데 윤리와 도덕을 복음으로 잘못 이해하여 윤리와 도덕적인 삶이 곧 복음으로 사는 것이라 여겨 이 정도의 삶이면 괜찮게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얻은 감격으로 성령님과 더불어 그 감격에 대한 기쁨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인 삶입니다.
여름 내내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한 개미는 잔뜩 모은 양식으로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지만 베짱이는 여름이 다 지나도록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그냥 노래만 부르다가 추운 겨울이 닥치자 양식이 없어 개미에게 구걸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너무 열심히 일한 개미는 신경통, 류마티스 관절염, 허리 디스크와 스트레스까지 쌓여 겨울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베짱이는 노래를 녹음한 음반을 내었는데 그것이 히트하여 떼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는 모순과 역설의 내용입니다.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신앙이 바로 모순과 역설의 결정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9)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은 피해야 정상인데 왼편 뺨을 그것도 치기 좋게 돌려대라는 말씀은 정말 모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이런 모순을 적용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사는 것이 바른 신앙의 삶이라고 말씀하시기에 딜레마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또 신앙은 역설입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말씀합니다. 약하면 약한 것이지, 약할 때 강하다는 것은 역설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 말씀합니다. 경쟁 시대, 자기 PR 시대에 자신을 낮추는 것이 높아질 수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역설이 아닐까요? 그러나 신앙의 모순과 역설 안에 신앙생활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달음질을 우리 인생살이에서 모순과 역설을 보거나 경험하더라도 분을 내거나 실망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모순과 역설을 우리 신앙의 삶에 잘 적용하면 감사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순례자로 살아가면서 비록 모순과 역설을 겪는다 할지라도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여유와 넉넉함을 보이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염려와 근심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인생을 “수고와 눈물뿐이요” 라고(시90:10) 말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에게는 없는 한 가지를 더 끌어 안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오는 갈등과 괴리감일 것입니다.
불신자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탓할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혹 미필적 고의로 주일예배를 건너 뛰면 양심이 괴롭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고 야단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찜찜함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범해도 드러나지만 않으면 남들도 내 처지가 되면 그럴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 혹은 어쩔 수 없었다고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넘어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슴이 두근 두근, 얼굴이 붉어지고 신앙인의 양심으로 도저히 이게 아닌데 하는 이런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오는 갈등과 괴리감 때문에 자유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현실과 신앙 사이의 갈등과 괴리감이 ‘어쩔 수’ 없다는 상황 때문인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스파이로 오해 받습니다. 총리대신(요셉)은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가서 식구들을 봉양한 다음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와야 시므온을 풀어 줄 것이라 했습니다. 이 사실에 아버지 야곱은 펄쩍 뛰면서 반대를 합니다. 왜냐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두 아들 중 요셉은 이미 어릴 때 죽었고(?) 이제 베냐민 뿐인데 그 마저 잘못 되면 아내에 대한 미안함, 아비로서의 무능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냐민을 보내주지 않으면 시므온은 감옥에 있어야 하고 계속되는 기근으로 식구들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베냐민을 놓았을 때 시므온도 온 식구도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 신앙과 현실에서 오는 갈등과 괴리감 때문에 힘겨워 하는 것은 내가 포기를 못하고, 내려 놓지 못하는 그 어떤 ‘베냐민’ 때문은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과 타협하면서도 신앙과 현실에서 오는 갈등과 괴리감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아닙니까? 다른 것 다포기해도 그것만은 안된다는 그 베냐민을 놓아야 갈등이 사라지고 괴리감도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베냐민을 놓으십시오.
요즘은 웬만한 스마트 폰에는 길 찾는 네비게이션 기능이 있어서 찾을 곳의 주소만 입력하면 손쉽게 목적지에 갈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조금만 벗어나도 ‘경로 재설정’이라는 음성이 곧 바로 들려옵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잘 하고 있습니까? 혹시 내 삶의 경로는 재설정해야 할 부분은 없습니까? 또한 목적지를 향해 바로 가도록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을 잘 따르고 계십니까? 한 탐험가가 아프리카 정글 한복판을 탐험하고 있습니다. 가이드가 큰 잡초와 무성한 덤불들을 칼로 이리저리 자르며 능숙하게 길을 안내하고 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정글과 무더위에 지친 탐험가가 볼멘소리로 이런 푸념을 늘어 놓습니다. “여기가 어디요? 도대체 어딜 가는지는 알고나 가는거요?” 이에 노련한 가이드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리더니 웃으면서 말합니다. “제가 곧 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탐험가처럼 똑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어디로 데리고 가시려는 겁니까? 이렇게 내 삶의 복잡하고 고통스러운데 도대체 언제 이 형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내 인생에서 환란의 끝이 있기는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그 가이드와 마찬가지로 일일이 우리에게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고 하시면서도 그 ‘그 보여 줄 땅’이 어디인지 알려주시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한 두가지 힌트는 주실지 몰라도 그게 전부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설명하신다고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 힌트보다는 정답을 원합니다.
그 탐험가처럼 우리는 우리 인생의 정글, 삶의 음침한 골짜기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보여주셔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답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분만이 우리 인생의 완전한 네비게이션입니다. 혹 믿음의 달음질을 잘못하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면 그분과 함께 인생 경로를 재설정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새해가 벌써 18일째입니다. 복을 나누는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틀러의 독재에 대항하다가 8년간 감옥에 갇힌 로멜러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많은 울분과 미움, 그리고 복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가 전범으로 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다른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일곱 번이나 같은 꿈을 꾸었다고 말합니다.
꿈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 목사의 뒤쪽에 있는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그 사람을 향해 심판하시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예수를 믿지 않았느냐?”
이에 그 뒷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이 목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많이 듣던 목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그는 그렇게도 자신을 고문하고 괴롭혔던 히틀러였습니다.
목사는 고백합니다.
“아, 나는 저 친구를 독재자라고 대항하며 미워하고 죽일 생각을 하고, 어떻게 복수할까 궁리했지만 그를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구나. 전쟁의 책임은 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있었구나.”
그렇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는 많은 상처와 아픔, 또는 울분과 억울함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 때문입니까? 사람이나 환경 때문입니까? 다 나 때문이 아닐까요? 그 많은 상처와 아픔, 혹은 복수심을 품을수록 우리는 더욱 괴롭게 되고 힘들어질 뿐입니다. 씻어버려야 합니다.
강물을 거슬러 가며 카약(kayak)을 탈 때면 수많은 바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암초들을 치우면서 타지 않습니다. 피해 가며 타야 합니다. 그런데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나 바위와 암초들이 물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의 삶, 우리 신앙생활에도 경제적인 암초, 질병이나 관계의 어려움 등 곳곳에 인생의 바위들이 즐비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기에 충분한 달갑지 않은 요소들입니다.
그때마다 이런 것들과 싸워 이겨낸다는 것은 여간해서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가득 차 넘치면 이런 암초들은 성령님의 능력 안에 잠기게 되고 우리는 믿음의 카약을 끝까지 탈 수 있습니다.
이해와 사랑, 자비와 겸손이라는 인격의 강물이 나를 덮어 그 수위를 높일 때 믿음은 전진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 것은 외부의 높은 산이나 계곡보다는 내 안에 있는 탐욕, 이기심 같은 암초, 억울함이라는 바위, 시기와 열등감이라는 자갈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닐까요?
자동차 엔진에 끼는 찌꺼기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엔진 오일을 알맞게 교체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똬리를 트는 미움, 이기심, 분노, 욕심을 성령님의 은혜로 씻어내며 강건한 한 해, 풍성한 한 해를 일구어 가시기 바랍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가로챈 야곱은 형의 살기 등등 함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주하여 20년의 세월을 보낸 후 금의환향합니다. 그러나 형님의 노여움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에 두려운 야곱은 가축과 종들 먼저 앞세우고 그 뒤를 자식들, 아내들이 따르게 하고 자신은 홀로 남아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
날이 새도록 씨름 하다가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환도뼈)을 칩니다” (창32:25). 허벅지가 탈골 되었으니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관절이 빠지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꺾이지 않던 야곱이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싸움을 멈춥니다. 야곱은 자신과 씨름하는 분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임을 알고 더 이상 대들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 하필 ‘환도 뼈’였을까요? 이 환도 뼈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힘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환도 뼈가 부러졌다는 것은 자아가 꺾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절)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야곱이 허벅지 관절이 상한 상황에서도 물고 늘어져서 끝내 응답 받았다고 오해를 많이 합니다. 아닙니다. 끈기 있게 기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허벅지 관절이 골절 되었는데 어떻게 씨름을 계속 할 수 있습니까? 싸움은 이미 끝났습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싸움이 아니라 매달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한 후에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그전까지 야곱의 삶은 매달림이 아니라 발버둥이었습니다. 발버둥과 매달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발버둥은 뭔가를 믿고 있다는 겁니다. 내 노력, 내 경험, 내 지식, 등 어떤 뒷배가 있으니 발버둥 칩니다. 매달림은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점이 내가 매달리는 그 상대에게 있는 것입니다. 관절이 뒤틀렸는데 어떻게 발버둥을 칩니까? 눈치 9단인 야곱은 씨름을 하면서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싸우는 적에게 축복해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축복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재산이나 권력을 줄 때 축복했습니다. 두 번째는 내 삶을 부탁할 때 축복해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28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잡고 계시던 샅바를 놓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관절이 탈골 되었는데 정말 야곱이 이겼습니까? 이 말씀의 원래 뜻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내 힘으로 발버등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신앙은 더 이상 발버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맡기는 매달림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부끄러움도 아닙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의 그 은혜만을 구하며 매달리는 한 해가 되십시오.
새해 첫 주일입니다. 작년 12월 31일과 올해 1월1일 사이에는 특별한 시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1년을 365일로 하고 366일째는 그 다음 해로 하자는 약속을 했을 뿐입니다. 그 약속이 있기 때문은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반성과 함께 새로운 결심을 하면서 새해를 맞는다는 데서 참 좋은 약속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366일 째가 되고 367일 째가 되어도 내가 달라지거나 내가 변하지 않으면 그 해는 새해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별 생각없이 내 자신의 생각이 새로워 지거나 행동이 새로워진 것은 없으면서 형식적으로 ‘새해 복 받으세요’ 라고 인사하지 않습니까? 옛 가치관, 옛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옛 사람이면서 그냥 산술적으로 해가 바뀌었다고 새해라고 생각하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인사한다면 그 인사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고 촉구합니다. 이 말씀은 “벗어 버리는 일과, 입어야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내가 결단하고 실천해야 하는 일이고 그때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란 아담 안에, 즉 원죄 아래 일생 동안 죄에 매어 종 노릇하던 인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옛 사람을 죽이라” 하지 않고 “벗어 버리라”고 말씀하는 데서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라는 말씀대로, 옛 사람은 벌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함께 장사 지낸바 된 자들(롬6:6)이기 때문입니다. 즉 “본질상 진노의 자녀” (엡2:3)였던 옛 사람은 벌써 오래전에 죽었는데 이제 와서 또 “옛 사람을 죽이라”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죽이라 하지않고 벗어 버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무슨 뜻일까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교복이 있고 군복이 있고 운동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은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 버리라”는 행실(창35:2)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은 이미 죽었고 새 사람이 된 자들인데 아직도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의 습관(행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벗어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신분은 바뀌었는데 행실은 옛 사람의습관이 남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옛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우리교회는 미국, 캐나다,중남미, 유럽, 일본, 호주, 뉴질랜드를 아우르는 해외 한인 장로회 (Korean Presbyterian Church Abroad, KPCA) 와 한국의 예장 통합(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PCK) 교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