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채움교회 소개 | Sermon & Worship
the 채움교회의 주일예배 말씀을 다시 듣고, 목회 칼럼을 통해 말씀과 예배의 의미를 더 깊이 나누실 수 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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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람들은 두려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돈, 직장, 건강, 사랑, 명성을 잃을까 안절부절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사탄의 꼼수라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두려움을 이용해 사람들을 옭아매어 자신의 노예로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고 갑니다. 이 두려움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 있어서 무척 큰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어쩌면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는 말씀을 지난주 이 지면에서 말한 대로 로고스(Logos)에서 레마(Rhema) 말씀으로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안에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만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사탄의 두려움이 비집고 들어온 것입니다. 토저라는 분은 “당신 안에 하나님께서 홀로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떤 능력도 당신에게 역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기 싫어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하찮은 것들과 경쟁하고 싶어 하시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를 들어 돈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할 때,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돈을 택할 것인가에 기로에서 고민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돈과 비교 상대가 되어 경쟁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처우를 하나님께서는 견디지 못하십니다. 왜냐면 그분은 우리가 아니라도 돌들이 소리 지르며 찬양하도록 만드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영광스러운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에게 다른 것과 경쟁 상대로 여김 받는다는 것은 모욕 중의 모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놓고 다른 것과 비교, 저울질하는 한, 주님이 능력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지극히 공의로운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사탄이 준 “사탄의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오직 우리 안에 그분만 홀로 있도록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직 그분으로만 채워지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로고스(Logos)라고 하기도 하고 레마(Rhema)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둘 다 헬라어로 ‘말씀’을 뜻하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로고스(Logos)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말씀입니다. 즉 로고스는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일컫습니다. 비유해 본다면 거대한 ‘저수지’나 마트에 진열된 ‘생수병’과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변하지 않는 물의 근원입니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원수를 사랑하라”처럼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이 모두 로고스에 해당합니다.
이에 비해 레마(Rhema)는 나에게 주시는 주관적이고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레마는 기록된 말씀(로고스)이 어느 순간 내 삶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살아 역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성령의 감동을 통해 내 마음에 깊이 다가와서 나를 행동하게 만드는 개인적인 말씀입니다. 비유해 본다면 저수지의 물을 내가 컵에 떠서 ‘직접 마시는 한 모금의 물’과 같습니다. 갈증을 해소해 주는 실질적인 힘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평소에는 그냥 읽고 지나쳤던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이, 내가 큰 시험이나 고통과 환란으로 낙심해 있을 때 갑자기 마음을 강하게 울리며 위로와 확신으로 다가오는 경험이 바로 레마입니다.
이 로고스와 레마를 요약하면 로고스가 우리 영혼의 양식이 담긴 ‘메뉴판’이나 ‘식재료’라면, 레마는 그 음식을 내가 입에 넣고 씹어서 ‘살과 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에서 이 ‘말씀’이 곧 레마(Rhema)입니다.
로고스라는 단단한 진리의 기준 위에, 매일의 삶 속에서 나에게 찾아오는 레마의 감동이 더해질 때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고 풍성해집니다.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도 대단한 신앙이지만, 그 믿는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여 내 삶에 적용시켜 실천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미국 스탠퍼드 의대 필립 하터 박사가 한 재미있는 조사를 했습니다. 지구의 인구가 100명밖에 살지 않은 동네로 줄이면, 57명은 아시아인, 21명은 유럽인, 14명은 미주인, 8명은 아프리카인이라고 했습니다. 52명은 남자, 48명은 여자이며, 70명은 유색인종, 30명은 백인이고, 종교 분포로 보면 70명은 비기독교인, 30명은 기독교인이라고 했습니다. 100명 중 80명은 적당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환경에 살고, 70명은 문맹이고, 50명은 영양부족이며, 100명 중 한 명만이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는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세계 인구를 60억이라 가정할 때 7명당 1명에 해당하는 8억 4천만 명이 배고픔과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중에 어린이들이 1억 6천 5백만 명이며, 매년 1천 2백만 명의 어린이가 죽어간다고 합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지체장애자들과 삶을 함께한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에서 “우리의 메시아는 붕대를 감고 계신다”라고 말했습니다. 메시아인 예수께서는 인간의 고난을 아시고, 그래서 고난받는 사람들을 이해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함은 물론 항상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에 우리는 실수와 허물,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사람들의 악함에 분노하거나 사람들의 불순종과 연약함을 정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악함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고난에 함께 울며, 그들의 사소한 즐거움에도 내 일처럼 크게 함께 웃는 사람입니다.
우리 이웃 중에는 질병으로, 파산과 실직으로, 이별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부간, 부모 자식 간의 갈등으로 코너에 몰려 있는 사람도 부지기수입니다. 보이지 않고 만나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 아닐까요?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에게 있습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눈이 지금보다 훨씬 크게 열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들과 더불어 우리 삶이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제사장이 되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세계인의 축제, 2026년 북중미 월드컵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지난주에 이어 나눕니다. 지난 목요일 대한민국 축구가 예상 밖의 졸전 끝에 남아공에 1:0으로 패함으로 타의에 의해 32강을 기다려야 하는 속상한 형편입니다. 이기지는 못해도 비기기만 해도 자력으로 32강에 오를 수 있기에 32강을 의심하는 팬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와 바람은 산산이 부서지고 패배한 것을 두고 갑론을박, 죽여 살려 하면서 격앙된 마음이 대한민국을 들썩이고 있습니다.
축구 경기에서 한 선수가 골을 넣으면 다른 선수들 모두가 달려와서 골을 넣은 선수를 얼싸안고 자기가 골을 넣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야구 경기에서 타자가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들어오면 대기 타석에 있던 선수는 물론 모든 동료들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두 팔을 들어 맞아줍니다. 마라톤을 완주하고 들어오면 메인 스타디움에서 그를 기다리던 코치와 감독, 여러 사람들이 긴 타올로 온몸을 감싸며 얼굴에 뽀뽀를 하고 얼싸안으며 기뻐해 줍니다. 복싱 경기에서 이기면 애타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뛰어나와 부둥켜안아 줍니다. 반면, 설령 경기에서 패했더라도 그를 응원하는 동료나 가족은 괜찮다고, 최선을 다했다고, 잘했다고 따뜻하게 안아 주며 위로합니다.
아무리 기쁜 일이 찾아온다 해도 친구가 없다면, 아무리 영광된 일이 생긴다 해도 성도가 없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해도 함께해 주는 가족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하루도, 올 한 해 절반도, 내 삶을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은 나를 걱정해 주고, 나를 믿어 주고, 나를 기대하고, 나를 위해 주는 모두들 덕분입니다.
2026년의 절반을 보내면서 함께 슬퍼해 주고, 함께 기뻐해 줄 내 삶의 응원군, 그들이 있기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같이 아파해 주고 같이 섬겨 주는 성도들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항상 동행해 주시는 그리고 늘 지켜 주시는 우리 삶의 든든한 후원자, 그분이 계셔서 행복합니다.
북중미 월드컵 축구가 한창입니다. 대한민국이 멕시코에 패한 것이 아쉽지만 아직 예선 한 경기가 남아 있어서 완전 탈락이 아니기에 너무 허탈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을 축구 경기로 재미있게 표현한 글이 있습니다. 30세까지는 준비 기간이고 30~60세까지는 인생의 전반전이고 60~90세까지는 후반전이고 그리고 90세부터는 연장전이라 했습니다. 여기에다 100세부터는 승부차기라고 말했습니다.
2026년 6월 21일, 이제 2026년의 전반전이 끝나가는 인저리 타임(추가 시간)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어느새 한 해의 절반이 흙먼지를 날리며 사라지는 시골 버스처럼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멀어져 가는 버스를 쳐다보며 놓쳐버린 안타까움에 울상 짓는 아낙네처럼 때로는 아쉬움, 어떤 때는 반성과 죄송스러움으로 6번째 달력 끝자락을 매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후반전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컵에 반 잔의 물이 있음을 보면서 ‘반밖에 남지 않았네’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반이나 남았네’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반의 시간들이 지나갔다는 사실 때문에 후회가 되고 미안한 것이라기보다 그 시간을 선용하지 못했고 생산적이지 못했고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자세로 다시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전반전에 실수하여 실점을 했어도, 반칙을 하여 옐로카드(경고)를 받아도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후반전에 최선을 다하면, 있는 힘을 모두 쏟아부으면 만회 골을 넣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연장전으로 갈 수 있고 인저리 타임에 승부를 뒤집는 인생의 극적인 반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24절에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하셨습니다. 2026년의 후반전을 다시 시작하기 위한 계획을 일구시기 바랍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만 5000명을 먹이고도 12 광주리가 남았다는 사실은 놀라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한 시작은 어린아이입니다. 성경에는 그 아이의 나이, 이름, 부모 등 개인적인 소개는 침묵하며 다만 “한 아이”(요 6:9)라고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그 아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너의 도시락이 그런 놀라운 역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믿었냐’는 물음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의 의중도 모르면서 그의 믿음(?)을 폄하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믿음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이 아이와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상식과 믿음을 많이 혼동하고 여과 없이 인식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아이가 제자에게 자신의 먹을 것을 건네준 것은 상식이었지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아이처럼 그냥 상식에 그치는 어떤 종교 행위를 하면서도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즉 우리는 믿음을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역사나 기적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겨자씨 같은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용하는 그곳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마 17:20).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상식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아는 상식을 믿을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상식입니다. 이 상식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는 이 상식을 믿음이라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인식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상식이 믿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입니다.
상식이 믿음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은 그 상식이 우리의 삶, 가치관, 생각에 변화를 가져오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통해 구분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상식을 알면 말씀의 내용이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예를 들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말씀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면 왜 창조를 하셨을까? 그 창조가 지금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식으로 묵상하며 적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상식이 믿음으로 진일보하는 것입니다.
상식을 믿음으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상식은 상식일 뿐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상식이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세계화’라는 말이 우리에게 익숙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세계화’라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캐나다의 한 칼럼니스트는 자신의 책에서 “세계화란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영국인이었지만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고, 그녀가 타고 있던 자동차는 독일제 벤츠였으며 벨기에인이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녀 옆자리에 동승한 사람은 이집트인 남자친구였고, 자동차 사고의 원인이 된 파파라치들은 이탈리아인들이었습니다. 파파라치들이 타고 있던 오토바이는 일본제 혼다였으며,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수술한 사람은 미국인 의사였고 수술에 사용된 마취제는 남미산이었다고 합니다.
다이애나 사후 세계 곳곳에서 배달된 조화는 네덜란드산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기사들은 한국산 삼성 모니터에 나타났으며, 사람들은 대만산 로지텍 마우스로 기사를 클릭하여 내려받았다고 합니다. 한 여성의 죽음에 이처럼 세계 여러 나라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것, 이것을 일컬어 ‘세계화’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계화는 세계 여러 나라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현상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화 현상은 환영할 만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계화의 단점은 다민족·다문화 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과 거짓에 대한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전통문화이고 무엇이 전통을 빙자한 유입된 미신인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이것은 신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는 뉴질랜드는 어느 나라 못지않게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풍습이 문화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신앙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으며, 심지어 미신에 불과한 얄팍한 것들이 기독교의 테두리 안으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채 슬며시 들어와 우리의 신앙을 흔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합리성을 앞세운 첨단 과학까지 더해지면서, 믿음을 전제로 하는 우리의 신앙은 비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참으로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이 뒤바뀐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계화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진실하며 참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기준임을 삶으로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며, 무엇이 참된 신앙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정경(正經), 곧 신앙의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서는 다른 말씀보다 어렵고 딱딱하여 읽기가 지루합니다. 그래서 마음먹고 창세기부터 읽다가 멈춰 버리는 것이 주로 레위기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의아한 내용이 많습니다. 13장부터 나병에 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정하고 또 어떤 것은 부정하며, 부정한 것은 제사장에게 보이고 제사장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나병 환자는 어떤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지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말씀합니다. 그런데 14장부터는 정말 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집 기둥이나 벽에도 문둥병이 생긴다는 것입니다(특히 14:36-42). 의학 상식이 없어서 모르지만, 어찌 생명체가 아닌 것에도 문둥병이 발병할까?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묵상에 묵상을 거듭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장막 속에 살고 있었기에 가옥(집)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저들의 현재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라기보다 장차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 때를 말씀한 것입니다. 즉,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도 문둥병에 걸릴 위험이 있음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거룩한 땅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사는 부정한 사람들에 의해 문둥병이 발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은 몸과 마음이 거룩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삶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집(가옥)도 거룩하고 정결해야 합니다. 집은 하나님 신앙을 실천하는 시작이요 좌소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방해하는 어떤 죄의 요소(문둥병)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이 없는 물체이기에 죄 된 요소들이 있어도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공간조차 내 믿음을 성장시키고 내 영적 성숙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있지 않은지 항상 살펴야 하고, 통찰할 수 있는 영안이 필요합니다. 너무 익숙한 삶의 자리이기에 자세히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 죄 된 요소가 생겼는지, 버젓이 자라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무생물인 집이 어떤 상태인들 무슨 대수일까가 아닌, 우리가 생활하는 영역 역시 정결할 때 그 속에서 거룩함이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혹 내 생활의 공간 속에 우리의 내면세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우리의 정신을 빼앗아 가기 쉬운 서적들이 놓여 있지 않습니까? 내 안방, 내 직장의 책상에, 내 식탁에 불신앙을 부추기는 그 무엇이 무심코 올려 놓이지 않았습니까? 정리하거나 내다버리십시오. 경건 생활에 지장을 주거나 공동체를 부정하게 하는 환경, 힘들고 어려운 세상살이를 어둡게 만드는 요소는 과감하게 척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어느 한 부분도 문둥병이 스며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신앙생활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옥살이를 치르고 백의종군했다가 다시 지휘봉을 잡게 되었을 때, 선조 임금은 이순신 장군에게 수군을 없애고 육군에 편입해 싸우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때 장군은 “상유십이”, 즉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고 신하(이순신)가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후에 장군은 남은 12척의 배로 왜적의 배 133척을 ‘명량해전’에서 물리치는 역사에 길이 남는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민자의 삶이라 한국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작은 일에도 신경이 곤두서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 듯 이구동성으로 삶이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그 아우성 속에 내 자신은 포함될 뿐, 나는 각박한 세상을 만드는 데 전혀 기여한 공로가(?) 없고 그저 피해자이며 남들 때문에 지금의 내 형편이 이렇다고, 내 인생에 굴곡이 생겼다고 넋두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게 없는 것을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있는 것에서 여유와 기쁨을 찾아 보면 어떨까요? 보이는 현실에 몸부림치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미래에 소망을 품어 보면 어떠할까요? 가지지 못했다고 열등감과 억울함에 사로잡히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와 만족으로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지금보다 더 윤기 나는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내게 적어도 12가지는 더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봅시다. 12가지가 아니라 122가지도 될 것입니다. 내 인생에 12가지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할까요? 만약 더 필요한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욕심이요, 이기심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쩌면 대부분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기에 상유십이의 신앙을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28, 30) 하셨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누구보다도 이 상유십이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내가 가진 것으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G.A. 발라드는 “영국 사람으로서는 넬슨 제독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한 번도 패한 일이 없는 위대한 동양의 해군 사령관, 이순신임에 틀림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상유십이의 신앙을 가진다면 이순신 장군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역사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1서 5:4)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한자어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습니다. 뽕나무 밭이 변해서 바다가 되었다는 뜻으로, 아주 급격한 변화가 생겼을 때 쓰는 말입니다. 요즘 세상이 변해가는 모습을 두고 상전벽해라고 일컫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작년에 한국을 다녀온 느낌을 적어 봅니다. 갈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지만, 생각 이상으로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한다는 것입니다. 건물의 모든 광고 간판이 어느새 규격에 맞추어 형형색색으로 잘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기다릴 때, 선로 안으로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리벽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우리의 문화 가운데 하나가 ‘빨리빨리’ 문화(?)입니다. 아마도 ‘속도’와는 거리가 먼 만만디의 나라, 세상 바쁠 것이 없어 보이는 곳에 살고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이에 비해 한국은 뭔가를 주문하면 다음 날 벌써 도착하고, 자동차 부품은 30분이면 카센터로 배달되고, 짜장면 주문은 수화기를 놓기 바쁘게 초인종 소리가 납니다.
물론 ‘빨리빨리’의 문화가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해도 편리한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측면에서 속도감이 있는 생활 습관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 습관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신앙도 ‘빨리빨리’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 성장은 주문하면 즉시 배달되는 물건이 아닙니다. 신앙 성장의 속성법은 없습니다.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돌 지난 아기가 내일 학교에 입학할 수 없듯이, 신앙 성장은 세월과 함께합니다. 밥이 뜸이 잘 들어야 맛이 있듯이 신앙도 ‘훈련’이라는 뜸이 잘 들어야 그 열매가 아름답습니다.
또 하나 성급한 생각은 신앙생활의 연수가 쌓이면 저절로 성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예배를 통해서 어느 정도 자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이지는 않습니다. 신앙 연조가 깊어지면 저절로 성숙이 된다는 것은 무미건조한 종교인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인으로 성숙되어 가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고, 배운 것을 삶에 적용하는 실천이 반드시 뒤따라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엡 4:13)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또 언젠가 한국을 방문하면 달라진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성장은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합니다(딤 4:7-8). 평생을 교회 안에서 살았다고 할지라도 훈련되지 않으면 성장과 성숙은 없습니다. ‘빨리빨리’는 신앙 성숙과는 맞지 않는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지 17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17년이 반평생보다 더 멀게 다가옴은, 뵙지 못한 그리움이 시간을 멈춘 까닭일까요? 그동안 잘 계시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말씀하시던 막내아들, 며느리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18년 전 수술 후유증으로 치매가 오셨다는 누이의 전갈을 받고 당신을 찾았을 때, 손자는 이따금 알아보아도 아들만큼은 또렷이 아는 듯 손을 잡고 놓을 줄 모르셨지요. 누이들은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치매 환자의 전형적인 일상인 알 수 없는 말씀을 혼자서 하시거나, 하루에도 몇 번씩 장롱 속 옷가지들을 꺼내어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가자 하여 누이들이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막내가 오니 그러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처음 뉴질랜드 간다고 말씀드릴 때, 자식이 하려는 일을 못 하게 막는 못난 어미라는 말을 듣지 않으시려고 대놓고 가지 말라는 말씀은 못 하신 채 “가지 말고 나랑 같이 살면 안 되나?” 지나가는 말씀인 양 얼버무리던 당신의 섬섬옥수를 뒤로하고 떠나온 막내아들을 못 보고 가실 줄 알았는데, 찾아온 그게 고마워 잠시라도 정신줄을 잡으려는 마지막 안간힘이었나 봅니다.
며칠 함께 있지 못하고 다시 뉴질랜드로 가야 한다고 말씀드리니, 누이의 아파트 정문까지 따라 나오셔서 못난 자식 얼굴에 당신의 홍안을 비비며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교회 잘 돌보고 아이들하고 잘 살아라” 하시던 말씀 말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뚜렷이, 전혀 치매 환자가 아닌 정상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 특별히 아들을 향한 애끓는 어미의 심정을 드러내도록 간섭하신 은혜의 순간이라 여겨졌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에게서 들은 생전의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그 후 또 한 번 쓰러지시고, 이젠 아예 병상에 누우셨지요. 며느리와 함께 다시 찾아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엔 정말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눈동자로만 반길 뿐 손을 잡기는커녕 말씀도 못 하시는 반주검의 모습에 아들의 마음은 통곡이었습니다. 며칠 후 큰절을 드리는 며느리와 아들의 작별 인사는 당신에게 올리는 생전의 마지막 절이었습니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어느덧 손자가 결혼하고 아들과 며느리도 이제 중늙은이가 되었으나, 꿈에라도 뵈었으면 하는 그리움이 사무치는 5월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어머니께서 그렇게 소원하시던 아들에게 주신 하나님 나라 전함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여기 머물며 여러 하나님의 사람들과 동거하고 있습니다. 여행 끝나면 곧 돌아가 어머니를 뵙겠습니다.
어머니, 아들이 여행 잘 마칠 수 있도록 그곳에서 기도로 응원해 주세요.
사무치는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어버이 주일에, 막내아들 드립니다.
존 드라이버 목사는 그의 책‘Images of Church in Mission’(교회의 얼굴/한국판)에서 “교회는, 부르심의 본질상 선교하는 곳이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가나안 성도’ 그리고 ‘쇠퇴하는 교회’와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회’ 이런 말들은 한국교회의 불편한 진실을 대변하고 있다. 교회의 정체성을 망각한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물이 아닐까요?
이제 교회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선택한 존재 방식은 사회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교회와 사회는 마치 빛과 어두움, 선과 악처럼 서로 이질적이므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분리 양상은 교회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저 멀리 도피하게 하여 그리스도인의 초점을 세상이 아닌, 미래적 천국에만 맞추도록 하였고 현세적 삶의 의미를 경멸하게 하여 세상은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체류지 정도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탈세상적 존재 방식은 교회가 오늘날 사회적 책임을 게을리한 주범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됨의 의미를 공간적 격리나 도피가 아니라 세상적 가치와 세상 구조, 세상 질서에 대한 거룩한 거절에서 오는 대조 사회로서의 교회 정체성 즉 선교적 교회로 탈바꿈해야 한다. 교회적 독특성과 대조성을 보여주는 선교 방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은 구별과 환대이다. 구별은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환대는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방식이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과 구별됨을 드러내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세상의 고통을 이해, 환대하는 섬김은 부족하여 고립을 자초하는 바리새인이 되고 말았다. 세상과는 다른 색깔, 다른 맛을 보여주는‘산 위의 동네’,‘세상의 소금’으로서 교회가 필요한 시점이다. 세상 질서와 차별화된 대조사회로서 교회상, 그런 선교적 교회가 이 시대에 요구되고 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 방식이자 존재 이유이다. 그 존재 방식으로 세상 속에서 대조 공동체로서 자리할 때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대조’의 사전적 뜻은‘둘 이상인 대상의 내용을 맞대어 같고 다름을 검토함’이다. 대조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결코 세상의 대안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세상과 본질상 같지 않음으로 인해 변혁을 요구한다. 따라서 대조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과 확연히 구분되어야 하고 존재 방식 자체가 다름을 보여 주어야 한다. 대조 공동체로서의 교회 이미지는‘소금과 빛, 산 위의 도시’로 명확하게 드러내야 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기독교란 무엇인가? 지금 이보다 더 긴박한 질문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것은, 복음은 오늘날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을 다르게 표현하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하는 일과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인가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뜻은 교회는 오직 복음에 근거하여 세상을 다양하게 환대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교회가 ‘다시 복음 십자가, 그리고 우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첫 걸음을 한 지 1주년 예배를 드리는 주일이다. 아직은 걸음마조차 어설프지만 복음으로 인생 행로에 지친 디아스포라들에게 다양한 환대를 실천하는 선교적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환대는 교회의 독특성과 대조성을 보여주는 선교 전략이다. 환대의 실천으로 교회의 존재 방식과 존재 이유를 드러낼 때 성경이 말씀하는‘산 위의 동네’,‘세상의 소금’으로서 교회 즉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비즈니스에는 젠 병인 목사가 “집사님, 웬 스시 종류가 이렇게 많습니까? 꼭 이렇게 수십 가지를 만들어야 합니까? 손님들이 선호하는 몇 가지만 만들면 시간도, 인력도 절약할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어설픈 경제 논리로 아는 척했습니다. 그때 그 집사님은 “목사님, 아닙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런 것 같은데 구색을 갖추어 놓아야 합니다.”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찾는 단 한 종류의 스시라 해도 구색을 맞추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색 맞추기는 꼭 스시 비즈니스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앙에도 구색 맞추기 신앙이 있지 않을까요? 별로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없으면 뭔가 심리적으로 허전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면 분명히 구색 맞추기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하나님도 믿지 않는 것보다 믿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해서 믿는다면 분명 구색 맞추기 신앙의 발로입니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만든 스시는 결코 사람들이 많이 찾고 즐겨 먹는 위치에 나열해 두지 않습니다. 한쪽 구석, 혹은 약간은 외진 곳이나 다른 스시를 다 진열하고 남은 공간에 놓아두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구색 맞추기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마음 한 켠에 두는 둥 마는 둥 합니다. 그러다가 아쉽고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아 마치 주인이 하인 부리듯이 함부로 사용합니다.
또 구색을 갖추기 위해 만들어 놓은 스시는 그것만 먹는 사람이 아니면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그런 스시가 있는지 없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듯이, 구색 맞추기 신앙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구색 맞추기 신앙을 소유한 사람의 삶을 보면 어떨 때는 하나님이 계신 것 같고 또 어떨 때는 전혀 아닌 인생의 모습을 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스시는 많이 만들지 않기에 손에 익숙하지 않아 만들 때마다 어색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색 맞추기 신앙은 하나님 신앙을 삶 속에서 적용하기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매 순간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신앙이 되기 어렵고 삶의 능력을 생활 속에서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구색 맞추기로 간주하면 하나님 역시 나를 구색 맞추기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을 스시 샵에서 깨닫습니다. 다음 주쯤 스시 샵에서 구색 맞추기 스시를 다 먹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색 맞추기 신앙이 없어진다면 말입니다.
얼마 전, YouTube를 보다가 우연히 10여 년 전부터 많은 한국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세상을 바꾸는 15분’이라는 프로그램 중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대학 교수가 방청객들과 대화 형식으로 어떤 주제를 가지고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강의 내용은 교수인 자신이 아버지와의 갈등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풀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아버지를, 아버지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부자지간에 대화가 없는 소통 부재의 관계로 갈등의 골이 깊어져만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사회생활을 하게 되고 결혼을 하면서 아버지와의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어색하기는 하지만 조금씩 아버지를 사랑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다 보니 이제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많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교수는 아주 중요한 한마디를 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한 번은 자식이 주는 용돈을 받아 들고 돌아서는 아버지의 약간은 굽은 등이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가끔 자식 행세를 한답시고 의무감에서 용돈을 드리곤 했고 아버지도 그 용돈만 받고 도망가듯 사라졌는데, 그날 따라 전에는 보이지 않던 용돈을 손에 들고 돌아서던 아버지의 등이 보이면서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아버지가 이해되고 이해가 되면서 소통이 되고 아버지와 아들은 피붙이인 천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소통과 이해의 부재는 사랑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 강의 요지였습니다.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그 사람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면, 혹 그 사람의 앞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 내가 타인의 앞만 본다면 여전히 이해도 소통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웃의 앞만 본다면 그 이웃 역시 나의 앞만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사람의 등 뒤를 볼 수 있는 연습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내 이웃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사랑이 시작될 것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가을은 비가 자주 내리는 스산한 계절입니다. 누구의 등 뒤가 보입니까? 그분의 등을 보듬어 주다 보면 차가운 겨울조차도 훈훈하게 맞이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상실감 앞에 서 본 적이 있는가? 감당하기 힘든 고난의 파도에 밀려,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덤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만 같은 막막한 순간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춰 서 있었다. 금요일의 십자가는 그들에게 끝이었고, 절망이었으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영광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가장 경이로운 지점은 그‘마침표’가 찍힌 자리에서 시작된다. 바로 부활이다.
부활의 의미는 단지 2천 년 전의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지적 동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 결코 삶을 이길 수 없다’는 우주적 구원의 진리를 내 삶의 현장에 초대하는 일이다. 많은 이들이 부활을 부정하거나 혹은 저 먼 미래, 우리가 죽은 뒤에 맞이할 막연한 사후 세계의 보너스 정도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보다 훨씬 더 시급하고 역동적인 현재의 구원 사건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은 ‘내일’의 약속인 동시에‘오늘’을 살아내게 하는 동력이다.
부활의 깨달음은 내 안의 ‘옛사람’이 무덤 속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수치심, 열등감, 지난날의 상처,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죄의 습성들, 우리는 이 낡은 옷을 입은 채 삶을 버거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빈 무덤은 우리에게 선포한다. “너의 그 낡은 자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이제 너는 그분의 부활 생명을 공유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세상은 결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부활 신앙은 ‘과정’속에 있는 우리를 안아준다. 비록 오늘 내가 눈물 흘리는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그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회복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부활을 믿는 자의 특권이다.
부활의 아침, 예수님은 가장 먼저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만났고, 상심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의 곁을 걸으셨다. 그분은 화려한 보좌 위에서 승리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깨어지고 지친 이들의 일상 한가운데로 찾아와 다시금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셨다. 그러므로 부활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화려한 기적이 아니라, 일상의 부활로 증명된다. 미워하던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감사의 제목을 찾아내는 것, 고통받는 이의 곁에 묵묵히 머물러 주는 것, 이 작고 소소한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 삶에 남기신 부활의 흔적들이 아닐까?
빈 무덤은 비어 있기에 충만하다. 그곳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이 머무는 자리가 아니라, 생명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터가 되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삶의 무덤이 혹시 너무 깊고 어둡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기억하라. 그 무덤은 이미 열려 있다. 죽음을 뚫고 나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지금 우리의 호흡 속에, 내가 딛고 선 그 땅 위에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흐르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매 순간 부활을 노래해야 할 이유이자, 오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한국 속담에 “나의 고뿔(감기)이 남의 중병(난치 혹은 불치병)보다 더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남의 괴로움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나의 괴로움보다는 마음이 쓰이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속담을 오늘날에 적용해 본다면, 자신밖에 모르는 극도의 이기심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을 고발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너무 비약일까요?
굳이 현대인들뿐이겠습니까? 그 옛날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임을 웅변하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 역시 자신을 위한 메시아로서의 환영이지, 예수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만족을 채우고, 자신들의 현안을 해소하기 위해 예수님을 열렬히 맞이한 것에 불과한, ‘자기 감기’에만 관심을 둔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리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목적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 이유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펼쳐 레드카펫(?)의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있는 무리들을 보는 예수님의 심리는 어떠했을까요?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불과 며칠 뒤, 열렬한 환영의 외침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돌변한 장본인들이었으니 예수님의 속내가 어떠했을까요? 차라리 양아들인 브루투스에게 배신당하여 죽어가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친 시저처럼, 무슨 원망이라도 한마디 하셨으면 속이 시원할 텐데 주님은 바보같이 가셨습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의의 겉옷, 자기 만족과 욕심의 레드카펫을 만들어 십자가의 길에 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길을 함께 가겠다고 외치는 무리가 우후죽순, 그 속에 내 자신도 섞여 있음을 어찌 부인하겠습니까? 십자가의 길과 레드카펫이 어디 어울리기나 하겠습니까? 목사가 된 지 30년이 훨씬 지난 올해도 여전히 종려주일을 맞습니다. 목사가 되어가고 있는지, 주님 제가 목사 맞습니까?
남이 모르는 나만의 고통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이 못 느낄 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를 때, 나는 답답하고 혼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예수님도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몰랐고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주아주 오래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그때였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를 환영하며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땅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했던 명마를 타고 위엄 있게 어깨에 힘을 주시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짐을 지고 나르는 나귀, 그것도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임을 웅변하는 것입니다. 평화가 무엇인지 보여주시고, 우리가 평화를 위하여 살 수 있도록,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세우기 위해, 그래서 나를 바로 구원하기 위해, 자원하여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거웠을까? 사람들은 미련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불과 며칠 후 그 환영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메아리칠 저들이기에 그저 주님의 마음은 검게 타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생각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자기 의, 자기만족, 자기 욕심에 도취되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무리 속에 내 자신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외치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모양은 어쩜입니까? 여전히 주님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나는 누구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아파하고 있습니다. 언제쯤이면, 내년이면 저 무리로부터 헤어나올 수 있을까요?
새색시 치마보다 더 고운 옥색의 하늘, 이에 질세라 푸르름을 한껏 자아내는 바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어느 날 하버(Harbour)를 건너면서 넘실거리는 파도에 춤을 추는 수많은 보트(Boat)들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 보트들을 바라보면서 스치는 몇 가지 생각을 적어봅니다.
먼저, 그 보트들 모두 주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트의 크기나 모양은 약간씩 달라도 주인 없는 보트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70억의 인구가 있고 제각기 다른 언어와 얼굴색, 다른 문화와 다른 곳에서 살아도 그 인생의 주인은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그럼에도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사실을 고집하며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 때가 허다합니다.
또 하나, 보트는 주인이 타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주인이 와서 보트를 움직이게 해야 비로소 보트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보트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역할은 주인이 나를 다스릴 그때 ‘나’라는 존재 가치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뭔가를 하면서 내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할 때가 많았고 주인이 원하지도, 허락하지도 않은 일도 많이 한다는 깨달음과 나의 주인이 세상에서 나를 사용하실 때 부지런히 주인의 필요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보트를 떠나면 보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주인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루 혹은 일년, 이년을 다시 주인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보트 스스로 바다로 나가려 한다면 갈 수도 없거니와 혹 나간다 할지라도 얼마 못 가서 부서지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스스로 내 인생의 때를 정할 수 없고 주인이 가라고 하면 가야 하고 서라고 하면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동적이고 제한된 인생 같지만 실수나 시행착오가 없는 더 능동적인 인생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보트가 훌륭한 최첨단 장비를 갖추었다 해도 바닷물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듯이 내가 세상적인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해도 성령님의 기름 부르심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하버를 지나면서 해 본 생각들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종교 개혁의 정신에 따라 전통이나 의식보다는 말씀에 근거한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을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사순절의 의미가 카톨릭보다 약하다. 그러나 교회는 역사와 현실이라는 상황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전통이나 의식이 형성되어 왔다. 예를 들면,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회나 수요예배, 금요 심야 기도회가 한국 교회가 만든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것들이 십계명처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성경의 명령이 아닐뿐더러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대다수 교인들은 새벽기도회나 수요예배 등에 참석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있으며 (근래에 와서 약화되고 있다) 항존 직분자를 택함에 있어서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에서 말하는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겨 볼 만하다.
“우리들이 해마다 지키는 사순절은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하는 계절이다. 교회 전통으로 이 사순절을 그리스도인들의 경건 훈련 기간으로 여겨왔다. 그리스도인들의 경건 훈련이란 기도 생활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 그리고 금욕 생활과 구제 생활을 그 내용으로 한다. 구체적으로, 금식 특히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회를 갖는 일과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의 흔적을 생각하는 일,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하기에 유익한 절기라 하겠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개신교가 지키는 사순절의 내용과 형식은 가톨릭에서 유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개신교에서는 정형화된 틀보다는 개인적 신앙이나 개인적 견해와 판단으로 동참하도록 권유한다면 가톨릭에서는 의무에 가까운 예식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순절 셋째 주일이다. 어떤 분이 “사순절은 네 가지를 순하게 만드는 절기”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사순절의 의미가 퇴색되고, 희석되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네 가지는 아니다 할지라도 금식을 포함한 기도 훈련,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훈련, 그리스도인의 소중한 덕목인 절제 훈련, 섬김의 훈련 중 하나라도 실천하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올해의 사순절이 되었으면 한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고난은 부활이라는 영광을 향하기 때문이다.
“이 목사님, 김 ** 목사입니다. 이거 연습으로 하는 것입니다. 답 주시면 감사하겠슺니가. 아직 메세지 보내는 것이 서툴러소...” “ 목사님 감사합니다. 평안하세요.” 얼마전 아흔이 넘은 노 목사님이 보내온 메시지에 대한 저의 답신입니다.
초등학생조차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일상화 된 문자 메시지의 편리함과 유익함은 문명의 이기답게 실로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 폐해도 여간 심각하지 않습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는 문자 보내기 삼매경, 심지어 예배 중에도 문자를 주고 받는 것은 이미 예삿일입니다.
노 목사님을 보면서 제가 연습 상대로 택함(?)받았다는 것이 참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고 있는 목사들이 한 두 분이 아닐 텐데 그 순간 그 목사님에게 생각난 사람이 저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제가 그 목사님에게 기억되어 선택 받았다는 사실이 감동으로 다가 왔다는 것이죠. 그게 무슨 대수라고, 별것 아닌데 혼자서 감동한다고요? 그런가요? 어떤 일을 하려 할 때나 촌각을 다투는 일이 부지 중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고 기억 되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는70억의 인구 가운데서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고 계심을 아십니까? 그것도 연습 상대로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긍휼의 대상으로 알고 계신다는 것 말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아도, 못해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카카오톡 친구 란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번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어른이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자 메시지 보내는 방법을 배우려는 열정이 무척 신선하고 아름답게 다가 왔습니다. 어쩌면 손주들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할아버지의 내리사랑일 수 있겠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르고 함께 호흡하기 위해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공유하려는 노 목사님의 의지는 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순간 심령을 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나를 더 많이, 더 깊이 알려는 사모함과 열정이 어느 정도이니?” “ 저...저.... 부끄러워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구름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살포시 수줍은 듯 웃고 있었습니다. 경건과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이 순간에 누가 가장 먼저 기억납니까? 그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보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이 도보로 사막을 횡단하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설상가상 지니고 있던 식량마저 다 떨어졌습니다.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결사적으로 걸었습니다. 마침내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샘터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샘물을 마시는데, 얼마 전에 누군가가 그 주변에 천막을 쳤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혹시 먹다 남은 음식 조각이라도 떨어진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주변을 자세히 살피는데 저만큼 주머니 하나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주워 만지는데 손에 뭔가 단단한 것이 잡혔습니다. 얼른 그 주머니를 풀어 보았습니다. 주머니 속에는 형형색색 아름다운 진주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진주를 한 움큼 손에 들고서 사방으로 내던지며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겨우 진주라는 말인가?” “겨우 진주라는 말인가?” 그리고는 얼마 후 그 사람은 그 사막 한가운데서 굶어 죽어 갔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진주처럼 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내 삶에 진주만 있으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 인생을 화려하게 하고 멋지게 꾸미도록 우리를 돕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작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채워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교만하게 만들고 인간성을 상실하게도 만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번쩍거리는 것에 현혹되어서 눈에 보이는 것들과 사람들의 이목에 편승하여, 정작 우리 삶 속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꼭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잊고 살 때가 허다합니다.
“아이들아, 내 말을 받아들이고, 내 명령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여라. 지혜에 네 귀를 기울이고, 명철에 네 마음을 두어라. 슬기를 외쳐 부르고,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여라.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화를 찾듯 그것을 찾아라. 그렇게 하면, 너는 주님을 경외하는 길을 깨달을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터득할 것이다” (잠언 2:1-5, 새번역).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귀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오늘도 우리 인생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자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진주보다 더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천로역정이라는 기독교 고전을 학창 시절에 읽어 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함께 성경 다음으로 사랑받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천로역정은 17세기 영국의 복음전도자인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작품으로 영어 제목은 “The Pilgrim’s Progress in the Similitude of a Dream”입니다. 번역하면 “꿈에 비유해서 쓴 순례자의 편력”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말은 한문의 제목을 그대로 옮겨 ‘천로역정’이라 합니다.
‘천로’는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말하며,‘역정’은 거쳐 온 길을 뜻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기독도가 해석자의 집에 도착하여 큰 방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하녀가 들어와서 빗자루를 가지고 막 방을 쓸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납니다. 쓸면 쓸수록 먼지는 계속 일어나는데 하녀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계속 빗질을 합니다. 얼마 후 한 사람이 거기에 물을 끼얹습니다. 그러니까 먼지가 다 잦고 깨끗이 쓸렸습니다.
여기서 큰 방은 ‘인간의 마음’이고 먼지는 ‘죄’, 빗자루는 ‘율법’(도덕)입니다. 빗자루로 쓸수록 먼지는 계속 나옵니다.
“착하게 살아라”, “올바른 사람이 되어라”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해서 갈등만 생깁니다. 그러나 물은 복음입니다. 복음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죄 사함을 받았을 때 우리의 마음은 회복됩니다. 도덕이 실패한 곳에서 복음이 시작됩니다. 인간의 윤리가 실패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윤리가 필요 없고 도덕적인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즉 빗자루로는 우리 마음의 방에 있는 먼지인 궁극적인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불신자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복음과 도덕의 차이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단순히 도덕이나 율법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는 복음이 아닙니다. 도덕도 복음이 아닌데 윤리와 도덕을 복음으로 잘못 이해하여 윤리와 도덕적인 삶이 곧 복음으로 사는 것이라 여겨 이 정도의 삶이면 괜찮게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얻은 감격으로 성령님과 더불어 그 감격에 대한 기쁨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적인 삶입니다.
여름 내내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한 개미는 잔뜩 모은 양식으로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지만 베짱이는 여름이 다 지나도록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그냥 노래만 부르다가 추운 겨울이 닥치자 양식이 없어 개미에게 구걸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는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너무 열심히 일한 개미는 신경통, 류마티스 관절염, 허리 디스크와 스트레스까지 쌓여 겨울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베짱이는 노래를 녹음한 음반을 내었는데 그것이 히트하여 떼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는 모순과 역설의 내용입니다.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신앙이 바로 모순과 역설의 결정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9)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은 피해야 정상인데 왼편 뺨을 그것도 치기 좋게 돌려대라는 말씀은 정말 모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이런 모순을 적용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사는 것이 바른 신앙의 삶이라고 말씀하시기에 딜레마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또 신앙은 역설입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말씀합니다. 약하면 약한 것이지, 약할 때 강하다는 것은 역설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 말씀합니다. 경쟁 시대, 자기 PR 시대에 자신을 낮추는 것이 높아질 수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역설이 아닐까요? 그러나 신앙의 모순과 역설 안에 신앙생활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달음질을 우리 인생살이에서 모순과 역설을 보거나 경험하더라도 분을 내거나 실망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모순과 역설을 우리 신앙의 삶에 잘 적용하면 감사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순례자로 살아가면서 비록 모순과 역설을 겪는다 할지라도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여유와 넉넉함을 보이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염려와 근심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인생을 “수고와 눈물뿐이요” 라고(시90:10) 말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에게는 없는 한 가지를 더 끌어 안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오는 갈등과 괴리감일 것입니다.
불신자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탓할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혹 미필적 고의로 주일예배를 건너 뛰면 양심이 괴롭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고 야단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찜찜함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범해도 드러나지만 않으면 남들도 내 처지가 되면 그럴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 혹은 어쩔 수 없었다고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넘어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슴이 두근 두근, 얼굴이 붉어지고 신앙인의 양심으로 도저히 이게 아닌데 하는 이런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오는 갈등과 괴리감 때문에 자유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현실과 신앙 사이의 갈등과 괴리감이 ‘어쩔 수’ 없다는 상황 때문인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스파이로 오해 받습니다. 총리대신(요셉)은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다른 형제들에게는 가서 식구들을 봉양한 다음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와야 시므온을 풀어 줄 것이라 했습니다. 이 사실에 아버지 야곱은 펄쩍 뛰면서 반대를 합니다. 왜냐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두 아들 중 요셉은 이미 어릴 때 죽었고(?) 이제 베냐민 뿐인데 그 마저 잘못 되면 아내에 대한 미안함, 아비로서의 무능함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냐민을 보내주지 않으면 시므온은 감옥에 있어야 하고 계속되는 기근으로 식구들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베냐민을 놓았을 때 시므온도 온 식구도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 신앙과 현실에서 오는 갈등과 괴리감 때문에 힘겨워 하는 것은 내가 포기를 못하고, 내려 놓지 못하는 그 어떤 ‘베냐민’ 때문은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과 타협하면서도 신앙과 현실에서 오는 갈등과 괴리감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아닙니까? 다른 것 다포기해도 그것만은 안된다는 그 베냐민을 놓아야 갈등이 사라지고 괴리감도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베냐민을 놓으십시오.
요즘은 웬만한 스마트 폰에는 길 찾는 네비게이션 기능이 있어서 찾을 곳의 주소만 입력하면 손쉽게 목적지에 갈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비게이션의 안내에 조금만 벗어나도 ‘경로 재설정’이라는 음성이 곧 바로 들려옵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주를 잘 하고 있습니까? 혹시 내 삶의 경로는 재설정해야 할 부분은 없습니까? 또한 목적지를 향해 바로 가도록 안내하는 네비게이션을 잘 따르고 계십니까? 한 탐험가가 아프리카 정글 한복판을 탐험하고 있습니다. 가이드가 큰 잡초와 무성한 덤불들을 칼로 이리저리 자르며 능숙하게 길을 안내하고 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정글과 무더위에 지친 탐험가가 볼멘소리로 이런 푸념을 늘어 놓습니다. “여기가 어디요? 도대체 어딜 가는지는 알고나 가는거요?” 이에 노련한 가이드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리더니 웃으면서 말합니다. “제가 곧 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탐험가처럼 똑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어디로 데리고 가시려는 겁니까? 이렇게 내 삶의 복잡하고 고통스러운데 도대체 언제 이 형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내 인생에서 환란의 끝이 있기는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그 가이드와 마찬가지로 일일이 우리에게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고 하시면서도 그 ‘그 보여 줄 땅’이 어디인지 알려주시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한 두가지 힌트는 주실지 몰라도 그게 전부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설명하신다고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 힌트보다는 정답을 원합니다.
그 탐험가처럼 우리는 우리 인생의 정글, 삶의 음침한 골짜기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보여주셔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답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분만이 우리 인생의 완전한 네비게이션입니다. 혹 믿음의 달음질을 잘못하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면 그분과 함께 인생 경로를 재설정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새해가 벌써 18일째입니다. 복을 나누는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틀러의 독재에 대항하다가 8년간 감옥에 갇힌 로멜러 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많은 울분과 미움, 그리고 복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가 전범으로 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다른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일곱 번이나 같은 꿈을 꾸었다고 말합니다.
꿈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 목사의 뒤쪽에 있는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그 사람을 향해 심판하시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예수를 믿지 않았느냐?”
이에 그 뒷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이 목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많이 듣던 목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그는 그렇게도 자신을 고문하고 괴롭혔던 히틀러였습니다.
목사는 고백합니다.
“아, 나는 저 친구를 독재자라고 대항하며 미워하고 죽일 생각을 하고, 어떻게 복수할까 궁리했지만 그를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지는 못했구나. 전쟁의 책임은 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있었구나.”
그렇습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우리는 많은 상처와 아픔, 또는 울분과 억울함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 때문입니까? 사람이나 환경 때문입니까? 다 나 때문이 아닐까요? 그 많은 상처와 아픔, 혹은 복수심을 품을수록 우리는 더욱 괴롭게 되고 힘들어질 뿐입니다. 씻어버려야 합니다.
강물을 거슬러 가며 카약(kayak)을 탈 때면 수많은 바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암초들을 치우면서 타지 않습니다. 피해 가며 타야 합니다. 그런데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나 바위와 암초들이 물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의 삶, 우리 신앙생활에도 경제적인 암초, 질병이나 관계의 어려움 등 곳곳에 인생의 바위들이 즐비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기에 충분한 달갑지 않은 요소들입니다.
그때마다 이런 것들과 싸워 이겨낸다는 것은 여간해서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가득 차 넘치면 이런 암초들은 성령님의 능력 안에 잠기게 되고 우리는 믿음의 카약을 끝까지 탈 수 있습니다.
이해와 사랑, 자비와 겸손이라는 인격의 강물이 나를 덮어 그 수위를 높일 때 믿음은 전진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 것은 외부의 높은 산이나 계곡보다는 내 안에 있는 탐욕, 이기심 같은 암초, 억울함이라는 바위, 시기와 열등감이라는 자갈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닐까요?
자동차 엔진에 끼는 찌꺼기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엔진 오일을 알맞게 교체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똬리를 트는 미움, 이기심, 분노, 욕심을 성령님의 은혜로 씻어내며 강건한 한 해, 풍성한 한 해를 일구어 가시기 바랍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가로챈 야곱은 형의 살기 등등 함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주하여 20년의 세월을 보낸 후 금의환향합니다. 그러나 형님의 노여움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이에 두려운 야곱은 가축과 종들 먼저 앞세우고 그 뒤를 자식들, 아내들이 따르게 하고 자신은 홀로 남아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
날이 새도록 씨름 하다가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환도뼈)을 칩니다” (창32:25). 허벅지가 탈골 되었으니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관절이 빠지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꺾이지 않던 야곱이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싸움을 멈춥니다. 야곱은 자신과 씨름하는 분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임을 알고 더 이상 대들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 하필 ‘환도 뼈’였을까요? 이 환도 뼈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힘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환도 뼈가 부러졌다는 것은 자아가 꺾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절)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야곱이 허벅지 관절이 상한 상황에서도 물고 늘어져서 끝내 응답 받았다고 오해를 많이 합니다. 아닙니다. 끈기 있게 기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허벅지 관절이 골절 되었는데 어떻게 씨름을 계속 할 수 있습니까? 싸움은 이미 끝났습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싸움이 아니라 매달림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한 후에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그전까지 야곱의 삶은 매달림이 아니라 발버둥이었습니다. 발버둥과 매달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발버둥은 뭔가를 믿고 있다는 겁니다. 내 노력, 내 경험, 내 지식, 등 어떤 뒷배가 있으니 발버둥 칩니다. 매달림은 자기를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점이 내가 매달리는 그 상대에게 있는 것입니다. 관절이 뒤틀렸는데 어떻게 발버둥을 칩니까? 눈치 9단인 야곱은 씨름을 하면서 이 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싸우는 적에게 축복해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축복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재산이나 권력을 줄 때 축복했습니다. 두 번째는 내 삶을 부탁할 때 축복해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28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잡고 계시던 샅바를 놓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관절이 탈골 되었는데 정말 야곱이 이겼습니까? 이 말씀의 원래 뜻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내 힘으로 발버등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신앙은 더 이상 발버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맡기는 매달림입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부끄러움도 아닙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의 그 은혜만을 구하며 매달리는 한 해가 되십시오.
새해 첫 주일입니다. 작년 12월 31일과 올해 1월1일 사이에는 특별한 시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1년을 365일로 하고 366일째는 그 다음 해로 하자는 약속을 했을 뿐입니다. 그 약속이 있기 때문은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반성과 함께 새로운 결심을 하면서 새해를 맞는다는 데서 참 좋은 약속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366일 째가 되고 367일 째가 되어도 내가 달라지거나 내가 변하지 않으면 그 해는 새해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별 생각없이 내 자신의 생각이 새로워 지거나 행동이 새로워진 것은 없으면서 형식적으로 ‘새해 복 받으세요’ 라고 인사하지 않습니까? 옛 가치관, 옛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옛 사람이면서 그냥 산술적으로 해가 바뀌었다고 새해라고 생각하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인사한다면 그 인사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고 촉구합니다. 이 말씀은 “벗어 버리는 일과, 입어야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내가 결단하고 실천해야 하는 일이고 그때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란 아담 안에, 즉 원죄 아래 일생 동안 죄에 매어 종 노릇하던 인간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옛 사람을 죽이라” 하지 않고 “벗어 버리라”고 말씀하는 데서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라는 말씀대로, 옛 사람은 벌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함께 장사 지낸바 된 자들(롬6:6)이기 때문입니다. 즉 “본질상 진노의 자녀” (엡2:3)였던 옛 사람은 벌써 오래전에 죽었는데 이제 와서 또 “옛 사람을 죽이라” 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죽이라 하지않고 벗어 버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무슨 뜻일까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교복이 있고 군복이 있고 운동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은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 버리라”는 행실(창35:2)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옛 사람은 이미 죽었고 새 사람이 된 자들인데 아직도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의 습관(행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벗어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신분은 바뀌었는데 행실은 옛 사람의습관이 남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옛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우리교회는 미국, 캐나다,중남미, 유럽, 일본, 호주, 뉴질랜드를 아우르는 해외 한인 장로회 (Korean Presbyterian Church Abroad, KPCA) 와 한국의 예장 통합(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PCK) 교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